인생의 롤모델, 떠나다 by 고선생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피자 발렌타인데이..



1990년부터 시작된 나의 한국 생활. 그 2년후인 1992년, '랩'이란 개념조차 모르던 내가 처음 들었던 이 한국어로 주절대는 도입부가 있는 특이한 가요는 내가 최초로 접하게 된 신해철의 곡, 재즈카페였다. 당시 뭣모르고 연말 학예회때 친구들이 날 끼워줘서 급합류하여 반 애들 앞에서 부르게 되었다. 비록 한마디 없이 이 공연을 기획(?)한 친구 뒤에 멀뚱히 서서 몸을 흔들댈 뿐이었지만.


당시 난 신해철이란 뮤지션도 몰랐다. 아니, 한국의 대중가요 자체를 잘 몰랐다. 한국생활을 본격적으로 막 시작하던 나는 대중음악은 커녕, 한국사회에 적응해나가던 시기였다.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배우는 동요가 내 나이에 맞는 노래구나 생각했을 뿐, 가요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 때가 나의 최초의 신해철의 음악을 접한 시기였다.


내가 동요를 벗어나 대중가수들의 음악에 빠져든건 그 이후로 급속도였다. 그도 그럴듯이, 당시는 한국 가요의 역사에 다시 오지 않을 굉장히 수준 높고 다채롭던 황금기였다. 그 황금기인 90년대를 10대로 보낸건 나에겐, 또 내 나이또래에겐 축복이다. 아이돌과 전자음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지금의 10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살아온 그 시대에 감사를 몇번이나 해도 부족하다 할 만큼.


19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란 뮤지션은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뮤지션이다. 물론 그 전에 조용필, 해바라기 등 즐겨듣는 뮤지션의 음악도 다수 있었지만 내가 '팬심'을 가지게 된 최초는 역시 서태지였다. 극성스럽게 쫓아다니고 편지보내고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앨범을 사서 아티스트와 소통하고 그가 나오는 방송을 챙겨보고 하는, 꾸준한 그의 팬이 되었다.
언젠가 블로그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내가 어떤 가수의 팬이 된다라는 것은 100% 그의 음악이 좋아서이지, 그 음악 외적으로는 큰 관심은 없고 크게 알고 싶지도 않다. 때문에 서태지가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주의를 고수하든 말든 난 그의 활동과 음악이 좋았을 뿐이다. 그의 음악은 혁신적이었고 가요계를 바꿨음이 분명했다.


간간히 '넥스트'라는 록밴드의 소식을 듣긴 했다. 하지만 당시 소프트한 음악을 주로 좋아했던 내게 록음악은 관심대상이 아니었고 일부러 찾아듣지도 않았다. 넥스트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리더가 어렸을때 처음 들었던 재즈카페의 신해철이란 점도 매치가 되지 않았고 넥스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건 알겠고, TV에서 그들의 노래인 도시인과 함께하는 꽃게랑 광고도 알았지만 관심대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난 넥스트 1,2,3집의 황금기를 무관심으로 날려버렸다..


내가 넥스트를 제대로 접하게 된건 1997년, 4집때였다. 많은이들이 그랬겠지만, 4집은 국내애니메이션 '라젠카'로 인해 알려지게 되기도 했다. 그 작품의 OST 앨범도 겸하고 있는 특이한 작품이었음과 동시에 음악적 완성도로는 넥스트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음악적 완성도에 매료되어 그때부터 '신해철'이란 인물을 다시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시절 이미 그의 음악을 들은 바 있으나, 세월히 더 흐른 뒤 신해철보다는 넥스트로 더욱 유명해진 그를 난 넥스트4집을 기점으로 역주행을 시작했다. 당시에도 여기저기 흔히 들리던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그의 데뷔곡이란 것, 넥스트 이전에는 부드러운 노래도 만들었던 아이돌이었다는 것, 그 와중에 재즈카페도 있었다는 것, 넥스트를 결성하면서 만들어낸 온갖 명곡들과 독보적인 공연문화. 그가 이룩한 많은 것들을 그나마 그의 전성기 시절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급하게 역주행해 복습하고 난 바로 신해철의 팬이 되었다. 어떤 뮤지션의 팬이 되는건 서태지 이후 처음이었다. 서태지-신해철로 이어진 나의 팬심은 그 뒤로 많은 뮤지션을 추종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서태지와 신해철이라는 무게감으로 내게 다가온 뮤지션은 없다.


앞서 말했든 뮤지션의 팬이 된다 라는것은 난 그의 음악이 좋기 때문이다. 서태지도 그렇다. 하지만 신해철이라는 인물은 그를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그의 음악때문만은 아니라는걸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서태지가 음악 외적인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도 어차피 서태지란 뮤지션은 음악을 좋아함으로 충분할 뿐이지만, 신해철은 음악 외의 활동도 많은 인물이었다. 수많은 언변에서 드러나는 그의 가치관은 그를 보는 대중들의 시선을 양분해버리는 작용도 했지만, 나에게는 그가 가진 생각과 가치와 신념 등이 나에게 어떠한 '길'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그의 수많은 곡들에서 나타나는 가사에서도 느끼곤 했지만, 그가 하는 말에서도 그 가사와 다름이 없는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신해철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의 가치관은 내게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숙한 민주주의 생활양식, 자신의 신념이 확실하다 생각하면 외부에 의해 흔들림없이 지켜낼 수 있는 굳건함, 세상이 정해놓은 답을 추구하는게 아닌 자신을 걸고 내세울 수 있는 답을 지켜나가는 모습. 그의 그러한 모습은 내겐 롤모델이 되었다. 부모님도, 학교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는 여러가지 것들을 난 신해철의 철학을 통해 흡수하게 되었고, 내가 생각하는 정말 멋진 사람, 내가 닮고 싶은 어른이 바로 신해철이었다. 어느새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를 팬으로서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개념이 탑재되면서 그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는 비중도 커지게 되었다. 그만큼의 용기는 없다 해도 그와 같이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블로그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이 남들에게 비춰졌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내 생각에 거침없이 당당하다 했던게 남에게는 고집스러움과 건방짐으로 비춰질 때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신해철은 나에게, 민주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누리고 책임져야 할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었다. 내게는 그랬다.
8090의 르네상스가 낳은 인물. 나약해질대로 나약해진 현시대에서 다시금 신해철과 같은 인물이 재림할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신해철같은 인물은 신해철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그토록이나 특별했다.


그의 별명이 마왕이었고 라디오프로에서 팬들이 스스럼없이 마왕, 마왕 그러곤 했지만 난 굳이 그렇게 별명으로 칭하는게 별로였다. 어차피 마왕이란 별명도 스스로 붙인것도 아닌걸. 나에게 그는 그냥 신해철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뮤지션 신해철이기도,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던 멋진 시민 신해철이기도. 한동안 뮤지션으로서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데 올해 정말 기습적으로 발표한 싱글앨범은 정말 기다려왔던 작품이었으며 예상치 못했던 그의 실험성 강한 음악은 만족 불만족에 앞서서 '진짜 신해철이구나'라는걸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곧이어 넥스트의 활동계획도 예정되어 있었고 방송에서도 많이 보일 것이란 기대에 향후 활동이 기대되고 있었다. 올해 유독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많이 컴백하는 해였다. 서태지도 나왔고.. 올해 상반기 발표한 신해철 싱글에 이어 넥스트까지 나온다니 풍성한 한 해구나 생각했다.


그는 너무나 갑자기 떠났다. 그것도 어이없이 떠났다. 이유는 짐작간다 해도 급사라고 해도 될만큼 확실한 이유불명으로 떠났다. 컴백예고와 앞으로의 활동이 확실히 예정된 상태에서 말도 안 되게 떠나버렸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나는 인생의 롤모델을 잃었다. 넓게 보면 한국으로서는 국내 음악계의 거물이자 천재이자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긴 뮤지션을 잃었다. 지금 떠나면 안 될 인물이었다. 절대로 말이다. 천재는 또다시 박명했다..
내가 좋아한 인물의 죽음 앞에 이렇게나 허탈한 적이 없었다. 많은이에게 그랬듯, 그는 천재뮤지션이자 나에겐 어떤 의미에선 선생님이었다. 그가 의식불명이란 소식이 난 첫날부터 하루하루 연예기사란을 클릭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다 막상, 진짜로 그의 부음소식을 기습적으로 접하고 나서.. 한동안 난 넋이 나가고 말았다. 


..사실 이 글은 밤새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이 정리된 후 쓰고 있다.


사후세계와 영혼이 있다는 가정하에, 그는 지금쯤 얼마나 어이없어하고 있을까. 과연 남겨진 가족을 내려다보며 슬퍼하고 있을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오 18~ 하면서 헛웃음을 짓고 있을까. 어느쪽이든 내가 아는 신해철답다.


나의 롤모델을 떠나보내며 안타깝고 화나고 슬픈 감정을 다 치워버리고 나면, 남는것은 '감사함'이다. 감수성의 10대시절, 그를 처음 알아 동시대에 활동하는 그의 수준높은 음악으로 인해 청춘이 즐거웠고 그 어느 세대의 청춘보다 좋은 음악을 접하게 해줬음에 감사한다. 나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것에 감사한다. 앞으로도 그가 보여준 많은 것들을 잊지 않으며 그의 장점들을 내것으로 만들며 멋진 신해철다운 멋진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해본다. 
그리고 당분간은.. 좀 많이 허탈하고 허무하고.. 그럴 것 같다.


신해철이 떠남으로 해서 많은 팬들이 그를 추모하고 그를 추억하는 이런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개개인이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음악을 첨부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그가 장례식때 울려퍼질것이라 우스개소리했던 민물장어의 꿈이라든지.. 멋진 가사의 넥스트 명곡이라든지..
나는 그와의 첫만남을 기억한다. 내 인생 최초로 신해철 이름 석자를 알게 해준 첫 노래, 내 12살에 그가 넥스트를 결성하기도 전 솔로가수활동 당시의 곡, 재즈카페다. 


1992년, 12살에 처음 알게 된 신해철은 그 이후로 나 자신의 일부를 만들어가게 한 인물이다.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남들이 다 마왕 마왕 그럴때 난 한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는데.. 마지막으로..



"고마워 나의 마왕."







Crom(신해철) - 일상으로의 초대






덧글

  • Blueman 2014/10/28 10:23 #

    저도 그 분이 방송활동할때 많이 즐거웠습니다. 명곡도 좋았습니다. 명복을 빌겠습니다.
  • 셔플동맹 2014/10/28 14:55 #

    위 사진 이전의 개인적인 말씀들 빼놓고 아래부터는 저와 일치하시네요..
    그야말로 롤모델이었습니다. 정말 가족의 죽음만큼 비통하고 안타깝습니다..
    힘들던 사춘기시절 여러가지 방향과 사고의 전환을 제시해주신 분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4/10/28 16:5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萬昏明星主人翁 2014/10/29 00:07 #

    정말 많이 공감합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 미니 2014/10/29 03:55 #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데빈 2014/10/29 08:58 #

    본인은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하늘에서 아오 18 그러고 있을듯.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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