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의 기억 by 고선생

요새 감기란 병은 계절과 상관없이 흔해진 것 같다. 날씨가 중구난방으로 난리를 치는 통에 그런 날씨변화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의 적응 미스로 인해 봄여름가을겨울 가리지 않고 언제나 감기에 노출된다.
난 독일에 와서 병에 걸렸을때의 난처함을 잘 알기에 감기만큼은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 조금만 조짐이 보이면
바로 약을 복용해서 잠재워버린다. 내가 이렇게 철저해진데는 크게 데인 경험이 있어서다.

2009년 1월말로 기억한다. 잠시 슈투트가르트에 살다가 다시 베를린으로 올라왔다. 그 때를 시작으로 대학교의
실기시험이 시작되었다. 사실 독일 대학교들의 실기시험은 3월 이후에 있는게 보통인데 베를린에서 지원했던
Weissensee KH의 실기시험은 유독 일정이 빨랐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다시 온 다음날, 마페(포트폴리오)를 학교에
직접 가서 제출했고 그 다음날이 바로 실기시험이였다. 그런데 이게 좀 웃긴건, 다음날 실기시험을 누구나 볼 수 있는게
아니라 이 날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그 하룻동안 심사해서 1단계 탈락자와 합격자를 구분해 놓는다. 바로 다음날이
시험이니까 통보따위는 없다. 내가 붙었는지 안 붙었는지도 모르고 일단 준비하라는 화구랑 작업도구들 바리바리 다
챙겨서 정해진 시간까지 가야 하는 것. 막상 가면 탈락자는 그냥 자기 작품 받고서 다시 집에 가는거다. 준비해간
실기시험용 도구들 도로 다 싸가지고.

사실 이 날 굉장히 추웠다. 2008년 12월부터 이어진 2009년 초의 겨울날씨는 굉장히 추웠다. 추운 날이지만 중요한
날이기에 학교에 작품 내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내일 무사히 통과되서 실기시험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였다.
어쨋든 집에서 여유있게 있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아침 7시까진가 8시까진가 그렇게 일찍 가야 했다.
잠자리가 좀 추운 듯 했지만 이불 껴덮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오전 5시 반.. 알람을 들었다. 그런데.. 전혀 몸을 일으켜세울 수가 없는 것이였다. 난 내가 가위에 눌렸나 싶었다.
가위눌림.. 정신은 있는데 몸은 말을 안 듣는.. 아니 무슨 이런때에 가위눌림이야! 그것도 난생처음??
근데 아니였다. 힘껏 힘을 줘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세웠는데.. 이 느낌은 마치 10배 이상의 중력속에 있는듯한 천근만근
느껴지는 나의 무게.. 그리고 머리를 세우면서부터 술에 취한듯 온 세상이 뱅뱅 돌며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
그렇다.. 밤새 내 몸은 완전히 바이러스에 침식당해 오염된 상태였다. 펄펄 끓는 고열에, 밤새 이불에 배인 땀으로 축축..
전날이 추웠고 추운날 돌아다니긴 했지만 밤새에 이렇게나 몸 상태가 바뀌어버릴 수도 있구나 신기할 정도였다.
아.. 아무튼 오늘은 시험날. 빨리 준비하고 나가지 않으면..!!

하지만 화장실에서 몸을 씻으면서도 전혀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고 잠결이니까 좀 있으면 몸 정도는 가눌 수 있겠지 싶었는데
이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거였다. 화장실에서도 몇번을 고꾸라질 뻔 했는지. 어지러움과 몸의 무거움은 계속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쉴 정도로 힘들게 힘들게 옷을 챙겨입고 그 무거운 스케치북 및 화구들을 넣은 가방을 둘러메고..
그날따라 가파러보이는 계단을 노인마냥 하나하나 겨우 내려가 마라톤의 종반부를 달리는 사람 마냥 오만상을 해가지고
겨우겨우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평소같으면 5~10분 걸리는 집에서 역까지의 거리를 한 15분~20은 걸려 간 것 같다.
시험같은 중요한 일이 아니였으면 모든걸 캔슬하고 병원부터 갔을거다. 이런 몸상태로 외출한다는것이 처음이였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도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먹은게 없는데도 몇번이나 토할 뻔 했다. 이 상태라면 실기시험을
봐도 내가 과연 합격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했을때는...
나의 수험번호는 포트폴리오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당시엔 디자인과에 주력하던 시절이므로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있는 산업디자인과의 학교였는데(UDK라는 학교도 있지만
거기의 성향은 나랑 맞지 않음) 베를린에 사는 김에 여기서 다니고 싶다고 1지망으로 노리던 곳인데.. 허무하게 그냥 바로
탈락을 확인하는 순간이였다. 군말없이 내 작품을 찾아 들고 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정신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도 잠시,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 집에 와서 엎어져 자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
정신을 차리고 학교 욕을 하기 시작한건 그 다음날부터였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무서운 독감을 경험한건 난생처음이였다. 온 몸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술에 취한 상태?
결국 집에 오면서는 두번정도 길바닥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꼴사납게.. 한번은 누가 보질 않아서 스스로 일어났고
한번은 친절한 아저씨가 부축해서 일으켜줬다. 더군다나 이 병 걸린 육신을 이끌고 집에 오는 길에는 눈이 펑펑. 눈 맞으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집에 오자마자 겉옷만 벗어던지고 바로 이불속으로 들어왔다. 일단 좀 쉬어야 제정신이라도 좀
돌아올 것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은 좀 돌아온 당일 오후엔 병원에 예약을 했고 다음날 바로 또 비틀비틀 병원에 갔다.

순간이였다. 잠을 자기 전, 자고 난 후에 몸상태가 이렇게 바뀌어있는건 처음이여서 신기하기까지.
실기시험과 겹쳐서 더 힘들었던 이 독감의 기억 후로 난 감기기운에 더없이 결벽증까지 생겨버린 것 같다.
콧물이 좀 난다, 가래낀 기침이 난다 싶으면 바로 해당 약을 찾아 먹는다. 원천봉쇄다.
혼자 있으면서 이런 무서운 제대로 된 감기의 경험을 한 후론 철저한 예방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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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cleo 2010/06/02 08:56 #

    동병상련.
    저도 지금 독감걸렸다가 나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일단 감기 걸렸다하면...병원가고 약 먹으면 일주일, 그냥 냅두면 7일이라더니.
    전 병원에도 갔는데 일주일째 골골거렸어요...T.T
    혼자 타지에서 생활할 때 아픈 것만큼 서러운게 없으니 늘 건강 조심하세요!!

    그리고, 몸이 좀 피곤하고 무리한다 싶으면.
    '바이러스'가 그걸 기막히게 알아차리고 침투하니깐 휴식도 적당히 해야하는거 잘 아시죠??
  • 고선생 2010/06/03 01:07 #

    으악.. 그래도 나아가는 중이라시니 그나마 다행이십니다.
    1주일=7일..; 결국 기본으로 한 주는 몸이 임시휴업에 들어가야 하는거군요..
    만약 제가 한국이였더라면 이러한 강한 독감에 걸렸다면 병원에 드러누워야 했을거에요. 독일이니까 병원 갔다가 약 타서 집에서 버텼죠.
    몸이 좀 약하다 싶은 그 때를 제가 인식조차 못하고 당해버리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이게 그 경우.
    그래서 스스로의 몸에 예민해졌답니다. 원천봉쇄 고고고
  • 홈요리튜나 2010/06/02 11:54 #

    감기는 평소의 컨디션 관리를 잘 하는 게 관건이죠..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_@
    저희 엄만 벌써 한 달도 넘게 함께 하고 있어요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잘 드시고 잘 움직이시는 게 최고!
  • 고선생 2010/06/03 01:09 #

    아휴 어머니께서 지긋지긋한 감기와의 싸움중이신거군요.. 얼른 나으시기를..
    저때도 그냥 실기시험 이후로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기에 암 생각없이 날 떨어뜨린 학교나 씹어대면서
    감기치료에 집중할 수 있었죠, 지금 바쁜데 감기라도 걸린다면.. 정말 낭패죠. 평소 관리가 필수입니다.
  • 한다나 2010/06/02 16:31 #

    으 그런일이 ㅠㅠ 역시 감기는 무서워요 ㅠㅠㅠㅠ!!!
    꼭꼭 몸 챙기시구요, 우리 건강하게 살아요!
  • 고선생 2010/06/03 01:10 #

    네 우리 건강하게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야 되니까요 ㅎㅎㅎㅎ
  • 2010/06/02 17:33 #

    저도 위염때문에 심하게 고생한 적이 있어서;;; 정말 혼자 살 때는 컨디션관리가 중요하다는 ; ㅁ ;a
    몸 가누기도 힘든데 혼자서 다 해야하는 서글픔 ㅠㅠ;;;
  • 고선생 2010/06/03 01:11 #

    전 저 때가 정말로 몸을 못 가눌 정도의 심한 상태라는게 이런거구나 제대로 체험한 거였어요.
    정말 대단하드랬습니다. 그 덕에 지금껏 잔병치레 안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지요 ㅎㅎ
  • 리슨양 2010/06/02 20:02 #

    힝힝 밖에서 혼자 살 때 아픈것만큼 서러운게 없죠. 전 외국까지는 아니어도 서울에서 혼자 살 때 아프면 진짜 슬펐어요 ㅠㅠ 저희 어머니도 외국나갈 때 신신당부한게 외국나가서 아프지 마라였다능 ㅋㅋㅋㅋ 얼른 나으세요 ㅠㅠ
  • 고선생 2010/06/03 01:12 #

    한국에선 아파도 병원이 여기저기 있고 예약할 필요도 없이 문 박차고 들어가면 되고 건강보험이 끝내주게 잘 되어있잖아요.
    그나저나 아팠던게 2009년 1월인데 나아도 한참 전에 나았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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