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첫 돈벌이 by 고선생

독일에 와서 하루하루 덧없이 돈 축내던 와중..

드디어 자그맣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2007년에 '나쁜짓'을 해서 땡전 한푼 벌어본적이 있긴 하다...-_-

 

산책하려고 기숙사에서 나오는데 초딩으로 보이는 독일애 두명이 내게 슬금슬금 다가온다. 쭈뼛쭈뼛 하는 모양새도 아니다. 쪼그만 녀석 두명이 모양새는 꼭 무슨 어리벙벙한 애 돈이나 뜯으러 오는 분위기다. "야야야야 너 이리와봐" 할거 같은.

오더니 대뜸,

 

"우리 좀 도와줘라."

 

...응?

"뭘 도와달라고?"

 

얘들이 하는 말이, 술을 사먹고 싶은데 자기네는 어려서 구입 제지당하니까 돈을 줄테니 나보고 사달랜다. 남은 돈을 수고비로 주겠단다. 헐..

순간 내 안의 천사와 악마는 눈 깜짝할 새 없이 악마의 승리로 이어지고 안 돼, 나랑 상관없다고 어린애들이 나쁜 짓 하는걸 두고볼수는 없어라는 바른생활 마인드는 돈이 최고야!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마인드에 힘없이 걷어차이게 된다. 지금은 훨씬 절망적이지만 그때도 유로환율 비쌌거등..

 

"그래 좋다!!"

 

그리고 애들 뒤따라서 슈퍼로 쫄랑쫄랑 간 다음 10유로를 받아들도 태연자약하게 슈퍼 술코너로 가 12유로 넘는 앱솔루트 보드카 옆의 8유로짜리 일반급 보드카를 손에 들어쥔다. 얘들이 또 특별주문한거거든. 자기네가 마실건 보드칸데 들어가면 앱솔루트 이런 비싼거 말고 그 옆에 보면 8유론가 하는 싼거 있을거니까 그거 사라고.;

나야 어른이니까 당연히 계산대에서 무사통과지.

 

나와서 애들한테 술병 건네고 거스름돈 2유로 남았다고 하니까 술병 받아들고 바로 뒤돌아 걸으면서 2유로는 그냥 가지랜다.

그 순간 튀어나온 나의 대답은....

 

기쁘게 "고.. 고맙다!"

 

 

.......

......

사실 고맙다는 얘기를 들어도 내가 들어야 되는거 아닌가..?

그런데 2유로 공돈이 생기니까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 고마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끼를 해결할 수도 있는 고마운 2유로 동전.

앞으로 이런짓 하지 마라 라고 충고는 못할 망정 2유로 앞에서 모양새 안 나게 애들한테 쿨한 자세로 '고마워'라니...-_-

 

 

암튼 이 에피소드가 나의 첫 벌이라면 벌이겠지만 엄밀히 일하고 돈 받은건 저번 일요일이였다.

 

어학원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 JiYe양의 소개로 이어지게 된 일인데, 자기의 독일친구의 또 친구가 영상회사에서 작업을 하는게 있는데 자기는 잘 모르겠는데 한국어 작업때문에 원어민을 구한다, 일해볼 생각 없느냐라는 제안을 받았었다. 벌써 작년의 일인데.. 지지난주에 드디어 그 독일친구와 통화하게 되었다.

일요일 정오로 약속을 잡고 당일날 그의 회사로 갔다.

 

갔더니 의뢰한 작업이란, 자기네가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슈테판 대성당의 소개를 해주는 다큐 영상을 제작중인데 그게 여러나라 언어 버전으로 믹스해 DVD로 낸다고 한다. 그 중에 한국어도 포함되며 해설더빙과 DVD 케이스의 설명글귀까지 완성되었는데 내가 보고 장면 장면에 삽입될 설명 더빙이 장면과 싱크가 매끄럽게 이어지는지, 화면과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원본 독일어 더빙판을 같이 보면서 편집하고 맞춰나가는 작업이였던 것이다. 또한 매끄럽지 않거나 별로 쓸데없는 멘트도 버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독어와 한국어가 가능한 원어민이 필요한데 알음알음해서 사람 구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한국어 작업을 하고 다음주에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등 총 10개국어 작업을 할거란다.

수당은 시간당 10유로로 쳐준단다. 이러니 내가 옳다꾸나하고 붙잡았지.

 

작업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둘이 앉아 영상 가편집본을 들여다보며 독어 더빙과 화면의 위치를 파악하고 한국어 더빙부분을 제대로 바로잡아주면 되는 것이였다.

 

아쉽게도 작업은 2시간 반만에 지나치게 원활하게 끝나버려 번 돈은 25유로(현재 환율 한화 약 50000원). 이럴줄 알았으면 일부러 좀 질질 끌어볼걸.

그래도 과거 나도 시각디자인 공부하면서 영상작업도 해봤고 다큐영상같은것도 해봤기 때문에 오랜만에 해보는 편집작업이 재밌었고 큰 돈은 아니지만 어쨋든 회사차원에서 영수증처리씩이나 해준 돈이기에 느낌은 남달랐다.

 

덤으로 DVD 케이스의 앞의 타이틀 문구와 뒷면의 설명문구도 봐달라고 했는데 글에 문제는 없으나 문제는


폰트!
굴림체!!!(←요 글씨)


 

니네 독일 애들은 당연히 한글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폰트모양상 어떤게 이쁘고 후진지를 몰라서 이리 작업을 했겠지만 한국사람이 보기엔, 특히나 디자인을 전공한 나의 눈에는 이 폰트는 정말 싸구려처럼 보인다, 내가 고쳐줄게. 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니말대로 우린 폰트에 대해 고려한 바 없고 이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잘 모르겠다, 니가 보기에 그렇다면 기꺼이 고쳐보아라 라고 하는데... 문제는 당연히도 다른 한글폰트가 없다..-_- 온리 기본 삼형제인 굴림,돋움,바탕 뿐.

 

이메일로 이 이미지파일(어도비 인디자인으로 작업중이였다)을 보내줘라, 내가 폰트 바꿔서 설치폰트파일이랑 같이 보내줄게 하니까 한다는 소리가, 그야 그래주면 우리야 좋지만 그거에 대해서 추가수당은 줄 수 없단다. 그러니 해주면야 고맙고 굳이 책임감있게 할 필요도 없다는 소리.

 

아니, 내가 이런거 많이 봐서 아는데 전세계 유수의 박물관이나 그런데 인포나 기념품샵에서 파는 안내책자나 DVD같은것들 한글판으로 나온거 보면 죄다 굴림체를 쓰고 있고 그건 기능과 정보전달일뿐 심미는 전혀 따지지 않은 타이포디자인이라고, 그게 짜증나서라도 디자인 배운 내가 멋지게 편집해줄테니 맡겨만 달랬다. 알파벳이야 너도 이렇게 작업했다시피 기본폰트가 아닌 어울리고 멋진 폰트를 쓰지 않았느냐, 내가 보는 한글도 마찬가지다. 라고.

 

그래서 이메일 주고받았고 메일주기로 했는데 아직 안주네.. 까먹었나.. 쩝. 위에도 썼지만 진짜 그런것들 한글까지 중국어 일본어에 이어서 나오는 추세인건 좋은 일인데 외국인력들이 죄다 작업하는지 디자인에는 관심도 없는 한국인들이 작업하는건지 편집디자인, 타이포그래피에는 신경 정말 안 쓴 한글들에 짜증났었는데..

 

어쨋든 결론적으로 두시간 반 일하고 25유로 벌고 나름 이 친구랑 연락처도 알게 되었고 재밌었던 일요일.

 

이런 알바라면 굉장히 능동적으로 많이많이 하고싶은데 말이다.


덧글

  • 오거 2009/03/17 13:15 #

    정말 외국 DVD에서 한국어 굴림체로 나오는거 참 싫더라고요.
    그 업체에서 얼른 이미지 파일 보내주면 좋겠네요.

    그런데...끝까지 읽어보니 약간의 감동이 밀려오는데,
    다시 한 번 읽다보니
    중간의 '고...고맙다!'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OTL
  • 고선생 2009/03/18 03:56 #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도 기막힙니다 ㅎㅎ
  • 城島勝 2009/03/19 05:55 #

    장한 일이로세. 다...당케! 보다는 훨씬 보람찬 일이군. 후하하.
  • 고선생 2009/03/20 00:35 #

    당케 쇤~! 이랬지.
    공손어법. 존칭어는 아니지만... 고.. 고맙습니다!-_-
  • 변태작가 2009/03/27 19:25 #

    오옷... 보람있는 일이었겠군요.
    굴림체는 정말 심히 없어보이는 글씨체죠--;
  • 고선생 2009/03/29 06:53 #

    그것도 타이틀용으로 말이죠.
    본문단락용으로 쓰는것도 못봐주겠구만... 근데 왜 한글의 컴퓨터 '기본폰트'가 굴림인것인지...
    특히 한글 타이포그라피에서 굴림은 죄악시한답니다 ㅋ
  • 고덕영 2013/01/16 00:15 # 삭제

    전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고 있는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재학중인 26살 청년입니다. ㅎㅎㅎ 우연치 않게 글을 봤네요..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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